스티브 잡스에 관한 책은 많지만 그가 인정한 공식 전기는 잡스 사후 출간된 이 책입니다. 주변에 이 책을 읽은 분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하나로 요약되더군요.
“존경할 만한 천재이지만, 함께 일하기는 싫다.”
그의 업적은 위대함 그 이상이지만, 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보인 독선적인 태도는 싫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책은 잡스의 부탁으로 쓰인 전기지만 그를 싫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한 그의 만행(?)이 여과 없이 담겨 있습니다.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보기 전까지는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오만한(?) 주장에 반박하지 못할 만큼 그가 만든 제품은 시대를 선도해왔습니다. 일각에서는 그의 제품들이 기존의 아이디어들을 짬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이에 대한 잡스의 답변은 그가 많이 인용했다는 피카소의 말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모방하지 않고 훔친다는 것은 자신만의 새로운 제품을 탄생시킨 말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애플의 제품은 ‘혁신적’이라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잡스와 함께 일하는 건 싫을 것이라는 사람조차 애정 어린 마음으로 잡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그가 단지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천재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가 만든 제품들이 자신들의 삶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잡스는 우리 시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아이폰'이 그랬습니다. 아이폰이 우리 시장에 들어오기 전에, 소비자는 값비싼 휴대폰을 사도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휴대폰에서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각 통신업체가 만들어 놓은 모바일 서비스 사이트를 이용해야 했는데 SKT의 준, 네이트나 KTF의 매직엔과 같은 서비스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조사들은 통신사의 눈치를 보느라 외국에 출시할 땐 있던 와이파이 기능을 국내에 출시할 때는 빼버렸습니다. 소비자가 무료인 와이파이로 접속하지 못하고 비싼 데이터 통신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소비자들은 이를 ‘스펙 다운’, ‘역차별’이라고 비난했지만 제조사나 통신사나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장의 불합리함은 ‘아이폰’ 출시되면서 일거에 해소됐습니다. 애플이 불리한 AS 약관 등으로 욕을 먹고 경쟁사의 엄청난 언론플레이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내 소비자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탐욕스럽게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 갈 궁리만 하는 기업들에 넌덜머리가 난 소비자가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다소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기업가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졌고 검소한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부를 많이 안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해서 존경을 받고 있는 ‘빌게이츠’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기부보다는 ‘제품’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향하던 신념이 완전히 깨집니다. 나는 맥으로 이윤을 짜내고 싶은 게 아니라 혁명적인 제품을 선보이고 싶은 거라고요.”(p.260)
애플의 제품은 미디어에 혁명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소통 방식을 바꿔 놓았습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가장 비근한 예는 아이폰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열풍일 것입니다. 정치적 성향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 사건은 메시지가 소통되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이폰과 팟캐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금 확장하자면, 미디어 학자 마샬 맥루한이 1964년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주장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정언이, 약 반세기 후에 애플(을 비롯한 IT 기업들)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폰(스마트폰), 팟캐스트, SNS… 최근 IT 트렌드를 설명하는 이들 아이콘들은 메시지가 전달되는 ‘메신저’에 불과하지만 소통의 민주화, 탈권력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 자체가 ‘메시지’로 역할한 것이죠.
스티브 잡스에게 6개 산업 부문에서 놀라운 혁명을 일으킨 창조적 기업가, 기술과의 소통 방식을 바꾼 미디어 혁명가,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시킨 디지털 철학가 등의 다소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전혀 호들갑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입니다.
존경하지만 함께 일하기는 싫은 사람 스티브 잡스. 그의 전기를 읽으면서 저 역시 함께 일하기는 싫다는 말에 동의했지만, 그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한 사람들은 어쩌면 축복받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