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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6. 21:17

나꼼수 비키니 사건이 잠잠해질까 싶었더니 다시 재점화되는 양상입니다. 김어준 총수가 4일 토크콘서트에서 “비키니 발언은 성희롱이 아니다”라고 해명한 것이 꺼져가는 불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여성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가 나꼼수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는 공식 입장을 밝히면서 나꼼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키니 사진을 보고 코피 운운하며 희희낙락한 나꼼수를 향한 진보적 여성 인사들의 실망어린 비판도 이해가 되는가 하면, 이게 어째서 성희롱이라며 도리질을 치는 그 반대 의견도 이해가 됩니다.

 

( 이와 관련한 저의 의견은 지난 포스팅에 정리해두었으므로 부연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http://onthelee.tistory.com/142 )

 

다만 이번 논쟁의 진행 과정에서 저는 다른 점이 걱정됩니다. 바로 정봉주의 석방을 응원하기 위해 비키니 사진을 올린 여성의 행위를 무의미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입니다. 논쟁이 극으로 치닫는 상황을 보면서 이 여성은 어떤 기분일까요? 분명 논쟁에 휘말린 어느 누구보다 착잡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특히 이 사태의 나꼼수를 비판하는 측은, 이 여성이 비키니 차림으로 가슴 부위에 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한 행위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별 연관성이 없는 무의미한 행위’ 정도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모피를 반대하는 여성들이 나체로 시위에 나서는 것은 “모피를 입느니 벗겠다”는 메시지의 연관성이 있는데 반해, 특정 정치인의 석방 운동을 응원하기 위해 비키니를 입은 여성은 ‘이유 없이’ 노출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비키니와 정치적 메시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리 문명화가 진행돼도 사라지지 않는 본능적인 욕망이 몇 개 있습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것들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매우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죠. 그 중에서도 인간의 성(비단 여성의 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은 가장 즐겨 활용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성’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할 때 그 사람을 불러서 자신에게 주목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메시지 전달의 시작은 메시지를 수신하는 사람들을 메시지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성’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죠.(여기서도 비단 여성의 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광고입니다. 광고의 가장 큰 목적은 메시지 전달입니다. 메시지 전달에 가장 특화된 채널이 바로 광고죠. 그래서 광고의 첫 번째 목적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광고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래의 아이팟 광고는 김정운 명지대교수가 2011년 8월 중앙선데이에 기고한 ‘왜 에디톨로지(Editology)인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다 한 방에 가는 수가 있다’ 기사에 인용된 것입니다.
 

 

이 글에서 김 교수는 “인간도 동물이다. 그러나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매일 발정기다. 밤낮으로 섹스만 생각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이트의 이야기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상대방의 나체를 보게 되면 바로 성기 쪽으로 시선이 가게 돼 있다. 동물적 본능이다. 그 위에 아이팟을 올려놓은 것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무서운 광고다.”라고 썼습니다.

 

여러분은 이 광고의 효과에 동의하시나요?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석방’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가슴을 메시지 보드로 활용한 여성의 사례도 광고로 본다면 매우 훌륭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결과적으로는 부정적 논쟁을 불러왔으므로 ‘시도’라고 할 수밖에 없겠네요.) 보기 싫어도 메시지를 보게 만들기 때문이죠.

 

최근 방송에 복귀한 모 연예인은 자신이 설립한 속옷 브랜드의 광고를 위해 본인이 직접 누드 광고를 찍었습니다. 당시 그는 팬티 바람으로 광고에 등장했습니다. 속옷 브랜드라서 메시지와 연관성이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몇 월 며칠에 옷을 모두 벗겠다”는 약속을 카피를 내건 그 광고의 효과는 ‘유명인의 벗은 몸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본능’을 자극해 주목도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광고 효과로 매출이 껑충 뛰었다고 하네요.

 

물론 이 모든 사례(여성, 남성을 떠나서)들은 ‘성’을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 역시 만약 누군가 “너는 ‘성’이 광고의 도구로 활용되는 세태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냐”라고 묻는다면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성’이 광고의 수단으로 무수히 활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성 아이돌의 꿀벅지에 열광하고 남성 아이돌의 초콜릿 복근에 환호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근육질의 남성들과 에스라인의 여성들을 보면 부러움에 눈길을 보냅니다. 근육질과 에스라인은 ‘성적 요소’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자신의 신체가 가진 성적 요소를 이용해 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효과를 높이려고 했던 비키니의 주인공 역시, 나꼼수 마초 논쟁과는 또다른 시각에서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를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이유 없이 야한 사진을 공개한 생각없는 사람 취급은 부당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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