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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29. 08:30
체급을 이긴 기량, 기량을 품은 아량, 모두를 빛낸 도량
[부산소비자신문, 22.11.30.]

인터넷에서 지난 10월 열린 어린이 씨름왕 대회 경기 하나를 보게 되었다. 한도경 선수와 정윤 선수의 8강전이었다. 가장 먼저 양 선수의 확연한 체급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몸무게가 한도경 선수는 107kg, 정윤 선수는 46kg. 두 배가 넘는 차이였다. 신장과 체격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체급 제한이 없는 대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합이라고 한다. 두 선수가 입장하여 모래판에 섰을 때부터 승부는 싱겁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첫째 판이 시작되자 한 선수가 정 선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들배지기는 한 선수의 주특기라고 한다. 그러나 정 선수는 안간힘을 쓰며 끝까지 버텨내더니 모래판에 내려오는 순간 안다리를 걸어 상대를 넘어뜨렸다. 내가 경기장에 있었다면 아마도 벌떡 일어나 탄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두 번째 판에서 한 선수는 다시 들배지기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정 선수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눕고 말았다. 승부는 일대일. 마지막 판이 시작되었다. 한 선수는 힘의 우세를 이용해 정 선수를 밀어부쳤다. 버티던 정 선수도 밀리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다시 회심의 들배지기. 정 선수가 바닥에 깔리며 승부는 끝났다. 아니 끝났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비디오 판독 결과, 정 선수의 등이 모래바닥에 닿기 전 한 선수가 왼팔을 뻗어 바닥을 먼저 짚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 선수의 승리였다. 몸집이 훨씬 작은 선수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가져간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사뭇 의아했다. 비디오 판독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정도로 기술이 제대로 들어갔고 정 선수가 불리한 자세였다. 한 선수가 굳이 팔을 땅에 짚은 이유를 알기 힘들었다. 느린 장면으로 다시 보았을 때, 어쩌면 체구가 큰 한 선수가 아래 깔리게 된 정 선수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땅을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손 모두 샅바를 잡은 상태로 쓰러지게 된다면 위에 있는 선수의 체중이 온전히 힘으로 변해 아래에 있는 선수를 찍어 누르게 됐을 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경기에서 승리했던 정윤 선수는 어느 유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도경 선수가 제가 다칠까 봐 손을 짚은 것 같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놀라움 연속이다. 자신보다 두 배 넘게 큰 상대를 만나서도 주눅 들지 않고 승리를 이끌어낸 정 선수의 기량이 놀랍다. 또 승부의 갈림길에서 맞이한 그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승리보다 상대 선수의 안위를 먼저 염려했던 한 선수의 아량은 더욱 놀랍다. 박수괄채와 함께 주어진 승리의 기쁨에 매몰되지 않고 상대 선수가 보여준 배려를 기억하고 공개적인 방송을 통해 감사할 줄 아는 도량 역시 놀랍다. 어른인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태도이고,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결핍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뉴스가 하나 떠오른다. 배달기사가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도착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하필 고장이었다고 한다. 고객의 집은 29층.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음식을 배달하고 다시 중간쯤 내려왔을 때,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취소했다며 다시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음식 주문 시 약속된 배달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주문 취소 사유다. 결국 배달기사는 다시 29층까지 걸어올라가 음식을 수거해야 했고, 이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며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일반적으로 약정의 위반은 계약을 취소할 수 있는 사유가 될 수 있다. 요즘 배달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하면 예상 소요시간이 표시되는데, 고객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구매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므로 약정의 내용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배달앱이 예상 소요시간을 현저히 초과한 경우 주문취소가 가능한 기능을 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배달시간이 지연된 사유가 음식점이나 배달기사의 과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고객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상황은 음식점이나 배달기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주의의무를 성실히 한다고 하여 예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법 제2조에서는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제1항),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제2항)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신의성실의 원칙이라고 한다. 이는 계약의 양 당사자에게 모두 적용되므로 사업자뿐 아니라 소비자도 신의성실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때로 우리가 당연한 나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일들이 공정과 형평의 원칙에 현저히 어긋날 때가 있다. 그것이 갈등으로 불거질 때 갑질 논란이 생긴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는 갑질 논란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법적인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만 배려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갈등이다. 나에게 어떠한 손해가 발생했을 때,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원인이 너에게 있으니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무조건 모두 책임지고 보상하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유치한 것이다. 시쳇말로 초딩스럽다고 한다. 어린이보다 못한 어른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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