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6. 12:41
[언론기고 등]
일주일만에 99.9% 폭락한 암호화폐의 교훈
신뢰가 흔들리는 시기에 경계해야 할 것들
[부산소비자신문, 22.5.31.]
먼 옛날 화폐가 발명 되기 이전의 세상을 상상해본다. 산에 사는 큰바위(가명, 19세) 씨는 생선이 먹고 싶으면 숲으로 들어간다. 한참이 지나서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나온 그는 바닷가 마을로 향한다. 바닷가에 사는 흰파도(가명, 23세) 씨는 솜씨 좋은 낚시꾼이다. 아침나절에 운 좋게 물고기를 5마리나 낚았다. 가족들과 3마리를 나눠 먹었는데 물고기를 굽느라 땔감을 모두 써버린 참이었다.
큰바위 씨와 흰파도 씨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그런데 거래가 성사되기 직전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땔감 한 짐과 생선을 몇 마리 바꾸는 게 좋을지가 문제였다. 큰바위 씨는 비탈진 산기슭에서 나무를 하고 또 여기까지 짊어지고 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강변했다. 반면 낚시는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니 참 편하겠다고 말했다. 흰파도씨는 오늘은 운 좋게 물고기를 잡았지만 어제는 하루 종일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하소연했다. 물 속의 고기는 보이지도 않고 잽싸게 도망을 다니니 잡기가 어렵지만, 나무는 산에만 가면 원하는 만큼 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화폐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큰바위 씨는 훨씬 편하게 생선을 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나무를 가까운 동네에서 팔아도 되고, 그렇게 번 돈(아마도 조개껍질이었겠지만)을 주머니에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닷가 마을로 향하는 것이다. 물론 생선 값을 두고 흥정을 벌이기는 하지만, 나뭇짐과 생선의 가치를 비교하던 것에 비하면 거래는 훨씬 수월하다. 생선 한 마리에 조개껍질 몇 개를 지불해야 하는지는 거래를 거듭하면서 형성된 '시세'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화폐의 역할은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는 수단으로서, 상품 교환을 위한 가치의 척도이다. 이러한 기능이 없다면 '화폐'라고 이름 붙이기가 어렵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통상의 방법으로는'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기도 어렵고, 상품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측정하기도 어려운데 '화폐'라고 불리는 존재가 나타났다. 실제 화폐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가상화폐(Virtual currency)라고도 불리고, 디지털 형태로만 존재하므로 디지털화폐(Digital currency)라고도 불린다.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을 이용해 암호화되어 발행되는 특징 때문에 암호화폐(Crypto-currency) 라는 이름이 가장 대중적이다. 대표적으로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이 유명하다.
암호화폐는 구조적으로 화폐로 사용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실제로 비트코인을 이용해 최초로 피자 구매에 성공한 2010년 5월 22일은 암호화폐 커뮤니티에서는 '비트코인 피자데이'로 매년 기념되고 있다. 결제수단으로서 암호화폐의 가치를 입증한 기념비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약 4만원어치의 피자를 구매하기 위해 지불한 비트코인의 현재 가치가 4천억원이 넘는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암호화폐의 지나친 변동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통화량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화폐로, 상품의 교환 가치를 측정하기란 쉽지 않다.
암호화폐의 지나친 변동성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나선 것이 스테이블(Stable) 코인이다. 지난 5월에 일주일 간 폭락으로 약 58조원의 자산 가치가 증발한 루나와 테라USD(UST)가 바로 스테이블 코인이었다. 가치를 달러와 연동시켜 변동성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로 개발된 이들 코인은 단 일주일 만에 99.9%가 폭락하면서 다른 어떤 암호화폐보다 더 심각한 변동성을 보였다.
문제는 이들 코인의 초창기 성공에 열광하며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던 사람들이다. 국내 피해자만 약 28만명이라고 한다. 하루아침에 큰 손실을 본 사람들은 테라와 루나가 사기였다며 분노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개발자인 테라폼랩스의 대표를 상대로 고소, 고발 등 법적 대응에 나섰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검찰과 경찰에서도 회사 운영과 투자자 모집 등 과정에서 불법은 없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한편 테라폼랩스의 대표는 실패에 대해서는 사과했지만, 곧이어 테라를 복제한 또 다른 암호화폐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이러한 계획에 대해서도 찬반 의견은 팽팽히 맞선다.
누구는 암호화폐를 다가올 미래 사회의 대안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암호화폐가 애초부터 깨지기 쉬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점은 모든 화폐는 신뢰로 유지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매달 월급날이 되면 통장에 숫자가 찍힌다. 나는 그 돈을 손에 쥐고 세지 않아도 그 숫자의 실체를 믿는다. 그 숫자를 언제든지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그 숫자만큼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무슨 이유로 통장에 찍힌 숫자로, 현금을 인출하기도 어렵고 물건을 사기도 어렵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은행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뱅크런(Bank run)이다.
1971년 미국은 더 이상 찍어내는 달러의 가치만큼 금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금본위제의 폐지였다. 그러나 달러는 망하지 않았다. 금이 있던 자리에 사람들의 신뢰가 들어섰을 뿐이다. 결국 핵심은 믿음이다. 실제 화폐든 가상 화폐든 신뢰가 무너지면 신뢰로 지탱되던 가치가 무너지고, 가치가 무너지면 가치로 지탱되던 실물이 무너진다.
1637년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뿌리 하나가 집 한 채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그 유명한 튤립 버블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실제 튤립 구근이 없어도, 당장 현금이 없어도 거래를 약속하는 증서(계약서)만으로 튤립을 사고 팔았다. 일종의 선물 거래였던 셈이다. 버블의 붕괴는, 튤립 뿌리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핵심은 믿음이다. 신뢰가 흔들리는 시기일수록 구름처럼 떠도는 소문과 봄바람처럼 설레는 성공담은 일단 경계하는 것도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