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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9. 26. 12:36
나의 파란만장한 중고차 구매기
중고차 시장이 보다 소비자 친화적으로 변화하기를
[부산소비자신문, 22.3.28.]
 
자동차를 사기로 마음먹은 건 취직해서 삼 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딱 십 년 전 일이다. 그즈음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아무래도 차가 없으니 데이트하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운전 경력도 없는 초보라서 중고차를 사기로 했다. 아직 모아 둔 돈도 많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대신 조금 비싸더라도 상태가 괜찮은 무사고 차를 사기로 결심했다.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중고차 거래 인터넷 웹사이트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겠더니, 며칠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감이 오기 시작했다. 어떤 배기량으로 살지, 어떤 회사의 어떤 모델을 살지도 정했다. 자동차에서 '트림'은 밥 먹고 더부룩할 때 입으로 나오는 가스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자동차에서 트림(Trim)은 한 모델에서 옵션 등으로 구분되는 등급을 말한다. 상위 트림일수록 옵션이 좋은 대신 가격은 비싸다. - 보험개발원의 카히스토리(www.carhistory.or.kr)를 이용해 사고 등으로 인한 수리 내역이 있는지 알아보는 법도 알게 되었다.
 
평일이면 열심히 매물 리스트를 만들어 주말이면 전화를 돌렸다. 대부분 아직 판매 중이니 방문하라고 했다. 수도권에 있는 매매단지들이었지만 대중교통으로는 두세 시간 가야 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어서 자동차를 사서 신나게 놀러 다닐 생각에 들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연애 중이던 여자친구까지 데리고 갔다. 스마트 컨슈머답게 철저한 사전 탐색을 통해 그 어렵다는 중고차 구매를 멋지게 해내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차갑고 냉혹했다. 내가 인터넷에서 찾았던 그 자동차들은, 출발하면서 전화할 때만 해도 판매 중이라던 그 자동차들은, 도착하기만 하면 구매할 수 없는 매물이 되었다.
 
조금 전에 다른 분이 먼저 계약을 하셨어요.
차 소유주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가격을 올렸네요.
분명 무사고라고 알고 올렸는데, 인제 보니 사고가 있었네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아니라, 슈뢰딩거의 중고차였다. 인터넷 안에서는 존재했던 매물이, 직접 가서 뚜껑을 열어보면 존재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매매단지를 돌았다. 수원, 부천, 인천... 밥을 사기로 하고 차 있는 친구와 함께 다니기도 했다. 대중교통으로만 가기 어려울 때는 택시도 탔다. 번번이 허탕을 치는 바람에 지치고 실망한 여자친구를 달래기 위해 좋은 식당도 가야 했다. 한 달이 넘어가자 중고차 보러 다니느라 쓰는 비용을 보태면 새 차를 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안 되면 중고차 구매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찾은 곳에서 찍어뒀던 매물을 발견했다. 시험 운전까지 마쳤다. 그러나 계약서에 표시된 가격은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봤던 것보다 수십만 원이 비쌌다. 판매원은 다른 판매상이 멋대로 올린 가격이라며 둘러댔다. "화를 내고 계약서를 구겨버려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어서 빨리 이 고통을 벗어나 여자친구와 알콩달콩하고 행복한 주말을 다시 찾고 싶었다. 분을 삭이며 '호구'가 되기로 했다. 나보다 한참 어렸던 판매원은 "사장님, 잘 생각했다."라며 나를 다독였다.
 
고생스럽게 구매했던 그 자동차는 다행히 지금까지 큰 탈 한번 없이 잘 달려주었다. 그때 함께 중고차를 보러 다녔던 여자친구는 아내가 되었다. 유아용 카시트를 장착하자 내부는 비좁아졌고, 아이들이 먹다 흘린 간식으로 시트는 더러워졌으며, 초보 운전자를 둘(나와 아내)이나 겪는 동안 무사고 차는 이제 多사고차가 되었다. 우리 가족의 처음부터 현재까지 항상 함께해 준 이 자동차에게 항상 감사한다.
 
차를 바꾼다면 이제 새 차를 사겠지만, 첫차로 중고차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소비자들은 내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최근 대기업인 완성차 업체가 직접 성능검사와 수리를 거친 후 품질이 인증된 중고차를 판매하겠다고 나섰다. 중고차 업계는, 대기업 독점으로 중고차 가격이 상승하고 소상공업체와 업계 종사자들의 생계가 위협받을 것이라며 반대한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연맹의 지난해 12월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의 66%는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허위매물 등 기존 중고차 시장에 대한 불신이 큰 것이 이유이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가 지난달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소비자의 80% 이상이 기존 중고차 시장이 불투명하고 낙후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이런 국민 여론 때문인지, 정부는 지난 3월 17일 중고차 매매업의 생계형 적합 업종 지정을 해제하기로 결정하여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을 허용했다. 부디 중고차 시장이 보다 소비자 친화적으로 개선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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