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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9. 5. 21:46
“내 보증금 ‘안전하게’ 되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전세 계약 시 담보 설정액, 선순위보증금 등 정보 제공 책임 강화되어야
[부산소비자신문, 21.9.30.]

 

조용한 버스 안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떠든다. 불편과 불쾌를 참다 못한 다른 누군가 외친다. “당신 이 버스 전세냈어?!” 이때 ‘전세’는 계약에 의하여 일정 기간 동안 계약한 사람만 이용하도록 빌려준다는 의미다. 집 등의 부동산 소유자에게 일정한 금액을 맡기고 일정 기간 빌려 거주하는 ‘전세’와 같은 단어라고 아는 사람도 많은데, 둘은 다른 단어다. 앞의 전세(專貰)는 ‘오로지 전’자를, 뒤의 전세(傳貰)는 ‘전할 전’자를 쓴다. 전세(專貰)는 계약에 의한 독점적 사용이, 전세(傳貰)는 계약이 종료된 후 맡긴 돈을 되돌려받는 점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버스를 하루 전세 냈다면 하룻동안 버스를 마음껏 사용하지만 버스 주인에게 지급한 돈은 돌려받지 못한다. 그러나 집을 1년 전세 냈다면 1년 동안 살고 나갈 때 집 주인에게 맡긴 돈은 모두 돌려받는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노릇이다. 비싼 집을 빌려서 실컷 쓰는데 명목상 지불한 돈은 없는 셈이다. (물론 실제로 지불하는 것은 목돈을 묶어두는 기회 비용이다.) 흔히 전세 제도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는 없다고들 한다. 따지자면 동일한 제도가 있는 나라는 몇 군데 더 있다. 다만 우리나라처럼 활성화된 곳은 없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월세만 있는 나라의 외국인에게 전세에 대해 설명하면 대부분 이해를 잘 못한다. 많은 경우 돈을 나중에 전액 돌려받으면 공짜로 사는 셈 아니냐고 반문한다. 우리나라에 전세 제도가 활성화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부동산 시장의 꾸준한 상승, (과거) 높은 자본수익률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집주인 입장에서는 적은 자본으로 부동산을 소유하여 미래의 집값 상승을 기대하거나 또는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빌려주고 받은 전세보증금을 다른 자본 시장에 투자하여 월세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매달 월세 부담 없이도 매매가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거의) 내 집처럼 거주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처럼 보이는 전세 제도가 우리나라 주거 문제 완화에 오랜 기간 긍정적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계약이 끝난 후에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전세보증금을 못 받게 되는 사고가 왕왕 발생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세입자는 전세금이 곧 전 재산이다. 전세금을 날리면 전 재산을 날리는 셈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전세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문제는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물 단위로 문제가 터져 피해 금액이 수십억원에 이르는 사례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런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갭투자이다. 갭투자는 집값에서 전세보증금을 뺀 차액만 갖고, 전세 계약을 동반하여 집을 구매한 후 향후 집값 상승으로 인한 수익을 기대하는 방식의 부동산 투자를 말한다. 개중에는 연쇄적인 갭투자로 수십 채에서 수백 채까지 집을 소유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문제는 투자 실패, 과도한 대출 이자 부담 등의 사고로 보증금 상환이 불가한 상태에 빠지는 경우다.

 

 
최근 부산에서도 오피스텔 임대인이 70채의 전세금 약 70억원을 챙겨 잠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부분 20~30대인 세입자들은 지난 7월 오피스텔 건물이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다는 통지를 받았다. 같은 건물에 살던 집주인은 이미 잠적한 후였다. 문제는 이 건물에 모두 88억원의 담보 설정이 되어 있어 오피스텔이 경매로 팔려도 세입자들의 보증금은 거의 돌려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이 건물은 담보가 층별로 다르게 설정되어 있었으나 집주인도, 공인중개사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세입자 상당수가 건물 전체의 담보액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수원에서는 더 큰 규모의 사고도 있었다. 임대사업자 1명이 무리한 갭투자로 원룸 건물 26채, 약 800가구를 사들였다가 대출 이자와 계약 만료에 따른 보증금 상환 요구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에 이른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공인중개사는 건물의 담보대출 규모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먼저 입주한 세입자들의 선순위보증금 규모를 감추기 위해 현황표에 전세를 월세로 허위 표시하는 등 기만적인 방법으로 전세 계약을 체결하였다.

 

 
유사한 사례들을 보아도 계약 체결 시 근저당 등 담보 설정 관계나 기존 세입자들의 선순위보증금 현황 등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경우 사고가 많았다. 집주인은 이해당사자이므로 속이려 들 수도 있겠지만 공인중개사는 임차인에 계약 물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계약 체결에만 급급해 이를 소홀히 하거나 오히려 불리한 정보를 감추는 일도 있다. 최근 정부는 부동산 중개수수료 상한 요율을 낮추는 내용으로 ‘공인중개사법 시행규칙’ 개정을 진행 중이다. 당연히 공인중개사 협회 등은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다. 현행 수수료가 적정한지 여부를 가리기 전에 부동산 중개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묻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다. 계약을 체결할 때 공인중개사에 지급하는 적지 않은 수수료는 단순히 매물 탐색과 계약 성사에 대한 수고료만은 아니다. 버스를 전세(專貰)하는 것이 아니고 부동산을 전세(傳貰)하는 것이므로, 맡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내 전세보증금 ‘안전하게’ 되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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